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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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기원전 319년경 테살리아에서 태어난 마케도니아 왕으로, '고나타스'는 무릎 보호 강철판을 의미한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을 분할한 디아도코이와 관련이 깊으며, 할아버지는 안티고노스 1세, 아버지는 데메트리오스 1세였다. 데메트리오스의 휘하에서 활동하며 그리스에서 지위를 확립하는 데 힘썼고, 켈트족의 침략을 격퇴한 후 마케도니아 왕으로 즉위하여 안티고노스 왕조를 부활시켰다. 에피루스의 피로스에게 잠시 왕위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회복했으며, 크레모니데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리스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제논의 영향을 받아, 궁정에서 문예를 보호하고, 통치자로서 백성과 법률에 봉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안티고노스는 80세에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베르기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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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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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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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Antígonos |
통치 정보 | |
직함 | 마케도니아 왕 |
통치 기간 |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74년 (첫 번째 통치) 기원전 272년 – 기원전 239년 (두 번째 통치) |
즉위 | 소스테네스 (기원전 277년) 피로스 (기원전 272년) |
퇴위 | 피로스 (기원전 274년)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 (기원전 239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필라 (셀레우코스의 딸) |
자녀 | 할키오네우스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 |
왕조 | 안티고노스 왕조 |
아버지 |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
어머니 | 필라 (안티파트로스의 딸) |
생애 | |
출생 | 기원전 320년경 |
사망 | 기원전 239년 (약 80세) |
2. 태생과 가족사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는 기원전 319년경 테살리아의 곤노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름 '고나타스'는 무릎 보호 강철판(고대 그리스어: ''gonu-gonatos'')에서 유래되었다.[1] 그는 디아도코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을 분할한 장군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들과 관련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였고, 아버지는 당시 아시아 상당 지역을 통치하던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였다. 어머니는 안티파트로스의 딸인 필라였다. 안티파트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지배했으며, 이론상으로는 통합된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섭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고나타스가 태어난 해에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영토와 패권을 둘러싼 투쟁이 심화되었다.
기원전 285년, 데메트리오스는 원정에 지쳐 셀레우코스에게 항복했다. 그는 아들 안티고노스와 아테네 및 코린토스의 지휘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 자신의 봉인이 찍힌 편지를 무시하라고 전했다. 한편, 마케도니아는 피로스와 리시마코스 사이에 분할되었지만, 곧 내분이 일어나 리시마코스가 피로스를 몰아내고 왕국 전체를 차지했다.[2]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적은 파란만장하였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재통합을 눈앞에 두었던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는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였고, 그가 통치하던 영토는 그의 적이었던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뤼시마코스, 셀레우코스에게 분할되었다.
3. 데메트리오스의 휘하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는 18세 무렵 아버지 데메트리오스가 9,000명의 병사와 함께 전투에서 도주할 때부터 그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승자들 간의 반목으로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가 잃었던 권력의 일부를 되찾고, 아테나이를 정복했다. 기원전 29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5세에게서 마케도니아 왕위를 빼앗았다.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외손자이자 카산드로스의 조카였으므로, 이전 왕들의 지지자들과 아버지 사이의 화해에 기여했다.
기원전 292년, 데메트리오스가 보이오티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던 중, 트라케의 지배자이자 아버지의 적이었던 리시마코스가 드로미카이테스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데메트리오스는 리시마코스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보이오티아 군대 지휘를 아들 안티고노스에게 맡기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데메트리오스가 없는 사이 보이오티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안티고노스는 테바이에서 이들을 포위했다.
데메트리오스의 트라케 원정은 실패했고, 그는 테바이에서 포위전을 치르고 있는 아들과 합류했다. 테바이 사람들이 완강하게 도시를 지키자, 데메트리오스는 함락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신하들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도시를 공격하도록 강요했다. 안티고노스는 심각한 손실에 대해 "아버지, 왜 우리가 쓸데없이 저들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으나, 데메트리오스는 "전사자에겐 군량이 들지 않는다."라며 병사들의 목숨을 경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숨도 경시하여, 포위전 중 쇠뇌 화살에 목을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기원전 291년, 데메트리오스는 공성 무기로 성벽을 파괴하여 테바이를 함락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 대부분과 마케도니아 지배를 발판 삼아 알렉산드로스 제국 복원을 목표로, 500척의 함선을 건조하는 등 대규모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데메트리오스의 전쟁 준비와 목표 때문에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퓌로스는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288년 봄,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가 그리스 근해에 나타나 반란을 선동했고, 리시마코스와 퓌로스는 각각 동쪽과 서쪽에서 마케도니아를 공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안티고노스에게 그리스 통치를 맡기고 마케도니아로 갔다.
당시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데메트리오스의 무절제와 오만에 분노하여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기원전 287년, 퓌로스는 베로이아를 함락했고, 데메트리오스 군대는 항복하여 퓌로스에게 넘어갔다. 이때 안티고노스의 어머니 필라는 자살했다. 아테나이는 봉기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나이를 포위했으나, 곧 인내심을 잃고 그리스 전쟁을 안티고노스에게 맡긴 채 보병 11,000명과 기병을 이끌고 카리아와 뤼디아를 공격했다.
데메트리오스가 소아시아에서 타우루스산맥으로 쫓겨날 때,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서 승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를 철수시키고 아테나이를 항복시켰다.
4. 통치 시기
아버지의 포로 생활 이후, 안티고노스는 자신의 충실함을 증명했다. 그는 여러 왕, 특히 셀레우코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통제하는 모든 영토를 넘겨주고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될 것을 제안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원전 283년, 데메트리우스는 시리아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버지의 유해가 자신에게 운반된다는 소식을 듣고, 함대 전체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 키클라데스 제도 근처에서 셀레우코스의 배를 만나 아버지의 유해를 성대한 의식과 함께 코린토스로 가져갔다. 그 후, 유해는 데메트리아스 마을에 안치되었다.[2]
기원전 282년,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이듬해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죽였다. 셀레우코스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셀레우코스를 살해하고 마케도니아 왕위를 찬탈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버지의 왕국을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지만, 북쪽으로 진군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패배했다.[2]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279년 겨울, 브렌누스가 이끄는 골족이 마케도니아를 침략하여 프톨레마이오스를 죽이고 왕국은 2년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를 방어하는 데 협력했지만, 아이톨리아 동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기원전 278년, 그리스 군대는 테르모필레와 델포이에서 골족을 막아내어 큰 피해를 입히고 후퇴하게 만들었다.[2]
기원전 277년, 안티고노스는 헬레스폰트 해협으로 항해하여 리시마키아 근처에 상륙했다. 케레트리우스가 지휘하는 골족 군대가 나타나자 안티고노스는 매복 작전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진영을 버리고 배를 해변으로 끌어올린 다음, 병사들을 숨겼다. 골족은 진영을 약탈했지만, 배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안티고노스의 군대가 나타나 골족을 포위했다. 안티고노스는 리시마키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마케도니아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화했다. 이 무렵, 안티고노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데메트리우스 2세 아이톨리쿠스가 태어났다.[2]
4. 1. 마케도니아 왕위 계승과 켈트족 격퇴
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침공에 대항하여 그리스 방위전쟁에 참가한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277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리시마키아 부근에서 켈트족을 격파하여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왕으로 인정받았다.[2] 이후 마케도니아로 진격하여 안티파테르 에테시아스를 격파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에피고노스를 몰아냈다. 알렉산더와 아르히다이오스 등 왕위 계승자들을 물리친 후, 카산드레이아의 폭군 아폴로도로스를 속임수로 제거하고 기원전 276년 말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장악했다.[3][4] 이로써 아버지 데메트리오스 1세의 죽음으로 단절되었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를 부활시켰다.
4. 2. 그리스에서의 세력 확대와 갈등
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침공에 대항하여 그리스 방위 전쟁에 참가하고 다음 해에 안티오쿠스 1세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기원전 277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리시마케이아 부근에서 켈트족을 물리쳤다. 이 승전 이후에 그는 마케도니아인들에 의해 왕으로 인정받았다.[1]
에피루스(Epirus)의 왕인 피로스는 기원전 274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돌아와 안티고노스를 마케도니아 북부와 테살리아에서 몰아냈다.[1]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의 몇 군데 도시밖에 차지하지 못했지만 피로스가 펠로폰네소스 지역으로 진격하자 그를 뒤쫓아갔다. 기원전 272년 아르고스에서 피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지배권을 확보했다.[1] 이제 그는 테살리아 동맹의 영수를 겸임했으며 이웃한 일리리아 및 트라키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1] 그는 코린트와 에우보이아(에보이아)의 칼키스, 테살리아의 디미트리아스 등 그리스의 '고리'를 이루는 3대 도시에 마케도니아 점령군을 주둔시켜 그리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립했다.[1] 더 나아가서 그는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들의 마케도니아 지지 세력들을 지원하고 시키온·아르고스·엘리스·메갈로폴리스 등지에서 참주의 집권을 도왔다.[1]
스파르타의 아레우스 왕과 아테네 시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사주로 그리스 해방전쟁을 선포했다(크레모니데스 전쟁, 기원전 267년~기원전 261년).[1] 이집트 함대가 사론 만을 봉쇄했지만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265년 코린토 부근에서 스파르타 왕을 패배시키고 이어서 아테네를 포위 공격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263년~기원전 262년 조건부로 항복했다.[1] 아테네의 관리들은 안티고노스가 임명한 사람들로 교체되었고,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한 지방 도시로 격하되었다.[1]
크레모니데아 전쟁 직후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와 합세하여 공동의 적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맞섰다.[1] 안티고노스가 코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섬사람 동맹'을 확보했다.[1] 기원전 255년 프톨레마이오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복동생 디미트리오스를 키레네의 베레니케와 결혼시킴으로써 이집트의 이웃 나라인 키레네에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확립했다.[1]
4. 3. 그리스에서의 쇠락과 죽음
기원전 253년 안티고노스의 조카이며 섭정이었던 알렉산드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원을 받아 코린토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독립 군주로 선포함으로써, 안티고노스는 그리스 남부의 통치거점인 코린트와 칼키스를 잃었다. 또한 아이톨리아 동맹이 테르모필라이를 점령함에 따라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대한 연계가 끊어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미망인 니카이아를 아들 데메트리오스 2세와 결혼시켰으며 계략을 써서 기원전 244년 코린트를 되찾았다. 이 동안에 아카이아 동맹이 위험한 적대세력으로 떠올랐다. 기원전 251년부터 아카이아 동맹은 시키온의 아라토스의 지도 아래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아라토스를 포섭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으나 헛일이었다. 기원전 243년에 선전포고도 없이 아라토스는 코린토를 기습공격하여 마케도니아군을 퇴각시켰다. 메가라, 트로이젠, 에피다우로스도 안티고노스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이 영토를 되찾으려고 하는 대신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했다. 연합세력은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원전 244년경 안드로스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안티고노스는 에게해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끝없는 전투로 이어진 생애는 80세의 나이로 끝났다.
5. 군주평
안티고노스 2세는 자신의 통치를 백성과 법률에 봉사하는 철학적 의미로 이해했으며, 아들에게 "우리의 왕좌가 고귀한 머슴의 신분인 것을 너는 모르느냐?"라고 말하며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했다.[16]
기원전 239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아들 데메트리우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군사적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교활함, 인내, 끈기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정치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데메트리우스나 피로스와 달리 안정적인 통치를 이루었다. 정직함과 예술을 장려하여 신하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철학자, 시인, 역사가 등 뛰어난 문인들을 곁에 두었다.[16] 베르기나에 있는 무덤이 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5. 1. 친구 선택과 통치 철학
그는 자신의 군주통치를 통치자로서 자기 의무를 엄격히 이행한다는 철학적 의미로 이해했다. 한번은 아들이 몇몇 신하들을 마구 대하는 것을 보고 그는 "우리의 왕좌가 고귀한 머슴의 신분인 것을 너는 모르느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군주정 개념에 따르면 통치자는 자기 직분을 책임지고 백성과 법률에 봉사하는 존재였다.안티고노스는 주목할 만한 지식인과 철학자들을 자신의 궁정에 모았다. 그는 메가라 학파, 피론주의, 견유학, 그리고 스토아학파와 관련된 다양한 철학자들과 관련하여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저서인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티고노스에게 아첨하며 그가 아테네에 올 때마다 그를 만나러 갔다"고 전해지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해전 이후 많은 아테네인들이 안티고노스를 만나러 가거나 그에게 아첨하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5]
메가라 학파의 철학자 에우판투스는 안티고노스를 가르쳤고, "그에게 매우 인기 있었던 『왕권에 관하여』라는 작품을 헌정했다".[6] 안티고노스는 음주 파티에 참석할지 여부에 대해 파이도의 철학 학파의 저명한 멤버인 에레트리아의 메네데무스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전해진다.[7] 안티고노스는 또한 피론주의 철학자 플리우스의 티몬을 알고 있었다.[8] 메네데무스와 티몬은 이전에 메가라 학파에서 함께 공부했다. 견유학파와 가장 유사한 것으로 알려진 절충주의 철학자 보리스테네스의 비온이 병에 걸리자 안티고노스는 그에게 간호사 역할을 할 두 명의 하인을 보냈고, 안티고노스 본인도 나중에 그를 방문했다고 한다.[9]
그러나 궁극적으로 안티고노스는 스토아학파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키티온의 제논은 스토아 학파를 설립하기 전에 메가라 학파와 견유학파 모두에서 공부했으며, 특히 안티고노스와 관련이 있었다. "안티고노스(고나타스)는 그[제논]을 또한 선호하여, 그가 아테네에 올 때마다 그의 강연을 듣고 종종 그를 자신의 궁정으로 초대했다"고 전해진다.[10]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제논과 안티고노스 사이의 짧은 편지를 재현하는데, 여기서 그는 스토아 학파에게 그의 궁정에 참석하여 마케도니아 백성을 위해 미덕을 실천하도록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논은 이 당시 여행하기에는 너무 병약하고 허약했기 때문에 대신 그의 가장 훌륭한 제자 두 명인 페르세우스와 테베의 필로니데스를 보냈고, 이들은 이후 안티고노스와 함께 살았다.
페르세우스가 안티고노스의 궁정에 있을 때, 안티고노스는 그를 시험해 보려고 그의 재산이 적에게 유린당했다는 거짓 소식을 그에게 전하게 했고,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며, "재산은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1] 페르세우스는 이후 마케도니아 궁정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안티고노스가 기원전 244년경 코린토스를 점령한 후 그는 페르세우스를 아르콘으로 도시를 통제하게 했다. 페르세우스는 기원전 243년 시키온의 아라투스가 이끄는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다가 사망했다.[12]
제논이 죽은 후, 안티고노스는 "내가 어떤 청중을 잃었는가!"라고 외쳤다고 한다.[13] 안티고노스는 이후 클레안테스에게 3000드라크마를 기증했는데, 그는 스토아 학파의 수장으로서 제논의 후계자였으며, 안티고노스는 그의 강연에도 참석했다.[14] 또한 제논 아래에서 스토아 학파를 공부했던 시인 아라투스는 안티고노스의 궁정에 살았다.
5. 2. 스토아 학파와의 관계
젊은 시절 안티고노스는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의 제자였다. 그는 아테네에서 제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기원전 276년에는 제논을 마케도니아의 펠라에 있는 자신의 궁정에 초대했다. 그러나 제논은 초대에 응하지 않고 대신 제자들인 페르세우스와 테베인 필로니데스를 보냈다.[10] 기원전 263년에 제논이 죽자 왕은 탄식하면서 자신의 공적 활동에 대해 가치 있는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을 잃었다고 애석해했으며,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도록 했다.페르세우스가 안티고노스의 궁정에 있을 때, 안티고노스는 그를 시험해 보려고 그의 재산이 적에게 유린당했다는 거짓 소식을 전하게 했고,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며, "재산은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1] 페르세우스는 이후 마케도니아 궁정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안티고노스가 기원전 244년경 코린토스를 점령한 후 페르세우스를 아르콘으로 임명하여 도시를 통제하게 했다. 페르세우스는 기원전 243년 시키온의 아라투스가 이끄는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다가 사망했다.[12]
제논이 죽은 후, 안티고노스는 "내가 어떤 청중을 잃었는가!"라고 외쳤다고 한다.[13] 안티고노스는 이후 클레안테스에게 3000 드라크마를 기증했는데, 그는 스토아 학파의 수장으로서 제논의 후계자였으며, 안티고노스는 그의 강연에도 참석했다.[14] 또한 제논 아래에서 스토아 학파를 공부했던 시인 아라투스도 안티고노스의 궁정에 살았다.
안티고노스 궁정에 머문 문인으로는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 널리 읽힌 천문학에 관한 교훈시 《파이노메나》를 쓴 실리시아 태생의 시인 아라토스, 피로스 등이 있었다.
참조
[1]
웹사이트
Antigonus Gonatas
https://www.oxfordre[...]
2020-08-12
[2]
서적
Antigonus
[3]
서적
Antigonus
[4]
서적
Antigonus
[5]
문서
Lives and Opinions, 'Arcesilaus'
[6]
문서
Lives and Opinions, Euclides
[7]
문서
Lives and Opinions, 'Menedemus'
[8]
웹사이트
Lives and Opinions, 'Timon'
https://www.perseus.[...]
[9]
문서
Lives and Opinions, 'Bion'
[10]
문서
Lives and Opinions, 'Zeno'
[11]
문서
Lives of the Eminent Philosophers
[12]
웹사이트
Description of Greece, Book II: Corinth
https://www.perseus.[...]
[13]
문서
Lives and Opinions, 'Zeno'
[14]
문서
Lives and Opinions, 'Cleanthes'
[15]
간행물
Edicts of Ashoka
[16]
웹사이트
Antigonus Gona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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